"강성갑 목사의 꿈과 삶"

'한얼’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심상백 | 기사입력 2022/06/1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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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갑 목사의 꿈과 삶"
'한얼’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기사입력: 2022/06/10 [11:42] ⓒ 브레이크뉴스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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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상백 교육선교사  

 


필자의 형제는 6남매로, 작고하신 강성갑 목사님이 1946년에 설립한 진영 한얼중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설립 당시 나의 선친은 행정실 책임자로 재직했던 심성택으로, 우리 가족은 한얼중학교에서 자연스럽게 동문이 되었다. 

 

현재 연세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인 홍성표 교수가 2년 전 “한얼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라는 제목으로 강성갑 목사님의 전기를 출간했고, 당시 나는 교직 은퇴 후 키르기스스탄에서 교육선교사로 활동 중이었으며, 2021년에 귀국해 강 목사의 헌신적인 삶과 죽음에 대해 기록한 이 책을 통해 큰 감명을 받았다. 

 

강성갑 목사의 삶을 통해 오늘날 우리 각자가 받은 사명을 어떻게 감당하고 살아가는지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고를 하게 되었다.

 

강성갑 목사는 1912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근면 성실한 농부인 부친과 기독교인으로서 자녀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모친의 보살핌 가운데 13세에 의령보통학교에 입학을 했고 6개월 후에는 마산 창신학교 4학년으로 전학하여 17세에 졸업했다. 

 

창신학교는 1906년 호주 선교사와 지역의 기독교 인사들이 설립한 학교로서 마산 지역을 대표하는 기독교 학교였기에 그는 재학 중에 교과 과정에 따라 성경을 배웠으며, 졸업 후 마산상업학교(현 용마교)에 입학하던 때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강 목사님는 1927년 4월에 마산상업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 3월에 졸업하였는데 ‘수신(修身), 일본어, 수학(산술, 대수, 상업산술, 주산), 지리, 이과, 영어, 법제경제, 상업(상업부기, 은행부기, 상품), 체조, 조선어’ 등을 이수했다.

 

그 후 강 목사는 1933년, 오형선의 딸인 오중은과 결혼했고, 오형선은 경남 거창 출신으로 1909년 주남선과 함께 거창읍 교회를 설립하는 등 이후 여러 교회를 설립했다. 

 

이미 25세의 만학도였던 강 목사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에 가정교사로 활동하였고, 당시 연희전문학교 원한경, 최현배, 이양하 교수 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특히 외솔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 강의는 후에 그의 농촌부흥운동의 정신적인 기조를 이루는데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강 목사는 1941년 3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그해 4월에 일본 도시샤대학 신학과에 입학했고 1943년 9월에 졸업했다. 

 

그해 9월 도시샤대학 문학부 신학과를 졸업 후 귀국한 강 목사는 부산의 초량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으며 조선장로교단 경남교구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강 목사가 초량교회 담임 목사로 목회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다. 

 

1946년 ‘한얼’이라는 이름을 걸고 중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한’은 우리 민족을 나타내는 말이며, ‘크다’, ‘하나’라는 뜻이다. ‘얼’은 사람의 마음, 혼을 나타내는 말이니, ‘한얼’이란 ‘큰 정신, 하나 된 민족정신’을 나타낸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교육 이념도 학생들과 의논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자, 흙을 사랑하자’로 정했다.

 

한얼중학교 교직원 명단을 보면, 교장 강성갑, 교유(교원) 오중은, 구광조, 천덕봉, 배명도, 김종한이며, 서기 심성택으로 여기서 기록된 심성택이 필자의 선친이다. 

 

강 목사는 1949년 3학년 학생들에게 “내가 죽거든 나를 땅에 묻지 말고, 나의 뼈를 실험실에 보관했다가 해부학 실험용으로 써 달라”고 말할 정도로 교정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6.25가 발발했고, 전쟁 중이던 1950년 8월 2일 밤, 강 목사의 집으로 찾아온 지서장 김병희와 경찰 2명에게 끌려나가, 수산교 아래 낙동강 변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총살을 당했으나 그는 그 순간에도 기도를 통해 “이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습니다. 학교 잘되게 해 주시고, 이 나라가 참된, 아버지가 원하는 나라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며 마지막 유언 기도를 했다.

 

강성갑 목사의 시신은 일주일 정도 지난 뒤 대산면 모산리 낙동강 변에서 발견되었고, 시신이 발견되자 흰옷을 입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산에서 진영까지 운구 행렬을 이루었다. 운구는 한얼중학교 학생들이 맡았으며 그의 시신은 평소 유언에 따라 교정에 안장되었고 당시 그의 나이 38세였다. 

 

한국 전쟁이 끝난 1954년 5월 27일 한얼중학교 교정에서, 함태영 부통령과 이상룡 경남도지사와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강성갑 목사 추모동상 제막식이 엄숙히 거행되었다. 강 목사의 추모 동상은 조각가 윤효중이 제작했고, 동상의 탑신 아래에는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강성갑 목사는 가난한 농촌의 자녀들을 위해 피와 땀으로 학교를 세우고 한 알의 밀알로 사신 이 겨레의 참 스승이었으며 우리에게는 영원한 상록수로 기억되고 있다.

 

강성갑 목사가 떠난 지도 벌써 72년이 되었다. 하지만 그분에 대한 업적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고 있는 부분은 우리 모두에게 무거운 숙제로 남겨졌다.

 

이제라도 강성갑 목사에 대한 업적이 재조명되어, 그분의 높고 숭고한 뜻이 온 누리에 힘차게 퍼져 나가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The wheat of ‘’ ’falls to the ground and" Dream and life of Pastor Kang Sung -gap "

 

My brother was six siblings, and Pastor Kang Sung -gap, who was founded in 1946, studied at the camp in 1946. At the time of his establishment, my father was the director of the administration.

 

Professor Hong Sung -pyo, who is currently a visiting professor at Yonsei University, published Pastor Kang's biography two years ago under the title of “Hanul's wheat falls to the ground.” At that time, I was an educational missionary in Kyrgyzstan after retirement. I was impressed by this book, which recorded Pastor Kang's dedicated life and death.

 

Pastor Kang Sung -gap, through the lives of Pastor Kang, I wanted to be a time to look back to a Christian who lived and lived today.

 

Pastor Kang was born in 1912 in Gyeongnam. His father and Christians, a diligent farmer and Christians, entered the general school at the age of 13, who had a special interest in their children's education.

 

Changsin School was founded in 1906 by Australian missionaries and local Christians. It seems to have accepted Christianity since time to time.

 

Pastor Kang entered the Masan Commercial School in April 1927 and graduated in March 1930. (Commercial boogie, bank boogie, product), gymnastics, Korean language, etc.

 

Since then, Pastor Kang married Oh Jung -eun, the daughter of Oh Hyung -sun in 1933, and Oh Hyung -sun was born in Geochang, Gyeongnam, and founded the Church of Geochang -eup with Junam -sun in 1909.

 

Pastor Kang, who was already 25 years old, worked as a tutor during his studies at Yeonhee College. It is described that it has greatly influenced the mental stance of the revival movement.

 

Pastor Kang graduated from Yeonhee College in March 1941 and entered the Department of theology of the University of Toshiba, Japan, and graduated in September 1943.

 

Pastor Kang, who returned to Korea after graduating from the Department of Literature, Toshiba University in September of that year, began pastoral ministry at Choyang Church in Busan and was ordained a pastor at the Chosun Church Gyeongnam Diocese.

  

Pastor Kang was the pastor of Choyang Church as the pastor of the Church Church.

 

In 1946, he established a middle school under the name of 'Hanul', which means 'Korean', which means 'big' and 'one'. 'Earl' is a word that represents a person's heart and soul, and 'Hanul' taught the students for representing 'great spirit, one national spirit'.

 

His educational philosophy also discussed with students and decided to love God, to love neighbors, to love the soil.

 

According to the list of Hanal Middle School staff, the principal Kang Sung -gap, the teacher's Ohjung, is my father, Gugwangjo, Cheondeokbong, Bae Myung -do, and Kim Jong -han.

 

Pastor Kang showed a passion for correction in 1949, saying to the third grade students, "If I die, don't bury me on the ground, keep my bones in the laboratory and write it for anatomy experiments."

 

Since then, 6.25 broke out, and on the night of August 2, 1950, when he was in war, he was dragged by Kim Byung -hee and two police officers who came to the house of Pastor Kang, and was killed by a communist on the Nakdong River under the Fisheries Bridge, but he prayed at that moment “It's because these people don't know. Let me be good at school, and please make this country a true country that my father wants. ”

 

Pastor Kang Sung -gap's body was found on the Nakdong River in Mosan -ri, Daesan -myeon, and when his body was discovered, thousands of people in white clothes formed from Mosan to the camp. Woon -gu was in charge of Hanal Middle School students, and his body was buried in correction according to his will and was 38 years old at the time.

 

At the end of the Korean War, at the Hanal Middle School Correction on May 27, 1954, the unveiling ceremony of Pastor Kang Sung -gap was solemnly attended by Vice President Ham Tae -young, Governor Lee Sang -ryong, and many people. Pastor Kang's memorial statue was produced by the sculptor Yoon Hyo -jung, and his remains were enshrined under the tower of the statue.

 

Pastor Kang Sung -gap is a master of the Korean, and is the true teacher of the Korean, and the god of a grain of wheat and sweating for poor rural children.

 

It has been 72 years since Pastor Kang has left. But the part of his achievements in Him is not right to be properly illuminated for all of us as a heavy homework.

 

Even now, his achievements in Pastor Kang Sung -gap are reexamined, and he sincerely hopes to see his high and sublime will spread vigorously throughout Nu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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