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세스페데스 공원, 관광지 개발을 주문한다

윤만보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2/05/20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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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세스페데스 공원, 관광지 개발을 주문한다
기사입력: 2022/05/20 [15:59] ⓒ 브레이크뉴스경남
윤만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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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만보 논설위원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남문지구에는 숨어있는 듯 작은 근린공원이 있다.

 

남문지구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조성된 공원인데, 바로 ‘세스페데스’ 공원이다.

 

세스페데스 공원은 ‘세스페데스 신부’라는 인물을 기념하기 위해 명명된 곳으로, 신부에 대해서는 일부 알려져 있는 바도 있긴 하지만, 누군가 하고 생소해 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신부는 임진왜란 시기에 왜군을 따라 조선에 들어온 최조의 서양인으로, 이 땅에서 왜군을 상대로 가톨릭을 선교한 신부다. 

 

그는 1551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스페인 살라망까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고 인도를 거쳐 일본에 들어왔고 교토, 오사카, 히라도 등지에 머물면서 30여년간 선교 활동을 펼치다 1611년 60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일본의 지배층들과 교류를 가지면서 선교 활동을 했는데, 그런 인연으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따라 조선으로 들어와 웅천 왜성에 머물면서 당시 전쟁 중인 일본군을 위해 1년 6개월 정도 복음 선교 활동을 하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신부는 임진왜란 발발 다음 해인 1593년 12월27 조선에 상륙했고, 최초 상륙 지점은 진해 웅천 사도마을 앞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신부의 방문은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일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웅천 왜성에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가 지휘하는 왜군 1군이 주둔해 있었는데 고니시는 아우구스티노스라는 세례명까지 받은 독실한 기리시탄 (가톨릭 신자)이어서 그 휘하의 장수와 병사들 중에는 그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 신자가 많았다. 그런 까닭에 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주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세스페데스 신부를 초빙했던 것이다.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사학자 중 한 사람은 교과서에서 배웠던 통설적인 내용을 바꿔야 하는 것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선 신부는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이고 그때까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은둔의 나라 조선을 서양에 알린 최초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조선에 상륙한 최초의 서양인으로 네델란드인 ‘벨테브레’(한국명 박연)라 알려져 있다.

 

1653년에는 역시 네델란드인으로 일본으로 항해를 하다가 제주도에 표류 한 하멜 일행이 있는데, 하멜은 조선에 7년 동안 억류 되어 지내다가 일본으로 탈출, 본국으로 돌아가서 조선에서 겪었던 일을 상세하게 기록한 ‘하멜 표류기’를 발표했는데, 하멜표류기는 조선을 최초로 서양에 소개한 기록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와 반해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에 온 것은 이보다 30~50년 정도 앞섰음에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앞에서 말한 세 신부는 조선에서의 활동 상황을 4회에 걸쳐서 서간문(書簡文) 형식을 빌어 교구청에 알렸는데 여기에는 왜군의 약탈이 빚은 조선의 참상과 조선의 기후와 생활상 등을 소개하고 있다.

 

‘아무도 원하지 않은 전쟁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모함에 의해 저질러진데 대한 안타까움' '죽음, 질병, 고아에 대해 기술과 평화협정에 대한 갈망' ’거북선과 해상에서의 조선 수군의 승리‘ 등의 내용은 전쟁을 직접 경험한 외국인의 시각에서 기록한 것이라는 점에서 임진왜란 전쟁사 연구에도 훌륭한 자료라고 평가를 받을 만하다.

 

세 신부가 조선에서 일어난 일을 서간문 형태로 교구청에 알렸다는 사실은 매우 괄목할 만한 일이다. 당시 가톨릭 교계는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에 세 신부는 이를 통해 임진왜란의 참상을 알려서 여론을 환기 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일부 인사들이 주장하는 ‘일본군 종군 신부 역할’은 극히 왜곡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에 천주교가 전해진 역사를 보면 16세기 중반 청나라를 왕래하던 사절에 의해 서양 문물이 전래되면서 소개되었다고 알려져 왔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귀국을 하면서 천주교 서적을 가져왔고, 일반인을 상대로는 18세기 들어, 조선 사람 최초로 세례를 받고 청나라에서 귀국한 이승훈을 중심으로 양반계층과 중인을 상대로 포교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는 천주교가 북쪽, 즉 청나라로부터 전래가 되어 지도층에서 전파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에 비해 세 신부의 선교활동은 이보다 1세기나 앞선 1593년 조선에 입국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천주교가 16세기 중반 북쪽으로부터 전래되었다는 주장과는 차이가 나는 것이다. 비록 왜군의 초빙으로 이루어진 일이고 활동 범위가 왜군을 상대로 제한되긴 했지만 서긴(書簡)에 병영 내에 포로로 붙잡혀온 조선인들에 대한 참상이 기록 돼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을 접촉 하면서 여러 가지 종교적 배려도 함께 하였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 해주는 근거로 볼 수 있는 것은 일본에 붙잡혀간 많은 조선 사람들이 노예로 팔려나갈 운명에 처해 있을 때, 세 신부는 이들 중 많은 사람을 천주교로 귀의 시켜서 노예 신분에서 풀려나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세 신부의 노력으로 이때 포로의 신분에서 방면된 사람이 수백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면 포로의 신분에서 행동이 자유로워진 조선인들은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대마도에서 보면 부산포, 거제도가 선명히 보인다. 왜인은 하룻밤 사이에 제포(진해 웅천)를 오갔다고 기록했다. 이들 중 일부는 탈출을 하였을 것이고 또 왜란이 평정된 이후 귀국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때 귀국한 천주교 신자 중에는 고향 땅에 와서도 그들 나름의 종교적 활동을 하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진해, 거제 등 남해안 일대에서는 일찍부터 천주교 교세가 강했고 기해박해(1839년 기해년) 등 천주교 수난 때에 많은 이들이박해를 당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 할 근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땅에서 천주교의 시발은 북쪽에서부터 전해진 것이 아니라 남쪽으로부터 임진왜란 시기와 맞물려서 전해졌다고 볼 수 있다.  

 

세 신부의 기념 공원은 1993년 스페인 정부로부터 자국민(에스파냐) 신부가 조선을 최초로 방문한지 40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패를 제작, 진해시(창원시로 통합되기 이전)에 전달함으로써 비롯되었다. 

 

당초 기념비는 진해시의 신청사 뒤편 풍호공원에 설치돼었으나 2016년 웅천동 남문지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이곳이 세 신부가 최초 상륙한 곳과 인근이라는 점 등이 고려되어 공원 내 현 위치로 이전을 해오게 되었고 주변 조형물도 함께 세워진 것이다.

 

세 신부의 기념탑을 공원내에 세울 때 조선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왜군을 위해 복음을 전파하고 미사를 올린 것에 대해 ‘종군신부’라 낙인을 찍어 그를 부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런 시도는 기념탑을 건립하기 전부터 있어 왔고 같은 이유로 천주교계에서 조차도 공식적으로 그의 활동을 내세우기를 거부하고 있으며 이는 오늘 날까지도 바로 잡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앞선 내용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 신부의 활동에 여러 가지로 기념할 만한 일이 많고 또 엄연히 기록으로 전해지는 역사적 사실인데도 이를 부정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마드리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세스페데스 신부에 대해 연구를 한 전 한국외국어대학장 박철 교수는 자신의 저서와 강의를 통해 이들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향해 ‘역사의 한 단면만을 보고 비판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면서 안타깝다’라고 말을 했다.

 

끝으로 덧붙이고자 하는 것은 창원시가 관광자원 확보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관광 자원의 개발에는 천혜의 자연이나 역사적 현장, 유물, 먹거리등 다양한 형태가 있으나 스토리를 개발하여 자원으로 삼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되는 한 방법이다.

 

하지만 기념탑 하나 덩그러니 세워놓고 지난 역사를 기억하라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반해 하멜이 7년 동안 머물며 생활한 전남 강진에는 그가 남겨 놓은 여러 흔적들을 모아서 ‘하멜 기념관’을 만들었고, 충북 단양은 온달 장군과 평강 공주의 스토리를 꾸며서 관광단지를 만들어 놓았다. 이들과 비교해 보아도 세 신부의 활동이나 스토리가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음에도 이를 방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창원시는 이들의 발자취를 잘 더듬어 보고 기록들을 꼼꼼히 챙겨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면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이는 천주교인들의 새로운 성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Contributed] Cespedes Park orders development of tourist attractions

 

In the Nammun district of Ungcheon-dong, Jinhae-gu, Changwon-si, there is a small neighborhood park that seems to be hidden.

 

This park was created when large-scale apartments were built in the Nammun district, and that is the ‘Cespedes’ Park.

 

Cespedes Park is a place named to commemorate a person called 'Father Cespedes', and although some is known about the priest, there will be more people who are unfamiliar with it.

 

The priest was the first Westerner to follow the Japanese to Korea during the Imjin War, and was a priest who preached Catholicism against the Japanese in this land.

 

Born in Madrid in 1551, he was educated by the Jesuits of Salamanca, Spain, and came to Japan via India.

 

During his stay in Japan, he continued his missionary activities while interacting with the ruling class in Japan. With that relationship, he followed the Japanese during the Imjin War to Joseon, stayed in Ungcheon Waseong Fortress, and did evangelical missionary work for the Japanese military during the war for about 1 year and 6 months. and returned to Japan.

 

The priest landed in Joseon on December 27, 1593, the year after the outbreak of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and it is said that his first landing point was in front of Sado Village in Ungcheon, Jinhae.

 

At that time, the first Japanese army commanded by Konishi Yukinaga was stationed in Ungcheon Waseong Fortress, and Gonishi was a devout Kirishitan (Catholic) who even received the baptismal name of Augustine. There were many believers. That is why, despite the shogun Toyotomi Hideyoshi's policy of rejecting Catholicism, he secretly invited Father Cespedes.

 

The fact that Father Cespedes came to Korea has many historical implications. One of his historians argues that some of the myths learned in his textbooks need to be changed.

 

First of all, the priest is the first Westerner to visit Joseon and the first person to introduce Joseon, a hermit country, to the West, which was not known at all until then. However, we are known as ‘Weltevree’ (Korean name: Park Yeon) from the Netherlands as the first Westerners to land in Joseon.

 

In 1653, while sailing to Japan as Dutch, Hamel and his party drifted to Jeju Island. Hamel was imprisoned in Joseon for 7 years before escaping to Japan, returning to his home country, and writing in detail what he experienced in Joseon. ', and Hamel's Drift is also well known as the record of introducing Joseon to the West for the first time.

 

On the other hand, not much is known about the fact that Father Cespedes came to Joseon 30-50 years earlier than this. The above three priests informed the parish office of their activities in Joseon in the form of an epistle to the parish office four times, which introduces the devastation of Joseon caused by the plunder by the Japanese army, and the climate and living conditions of Joseon.

 

Content such as 'A pity that a war that no one wanted was waged by Toyotomi Hideyoshi's recklessness', 'Craving for technology and a peace treaty for death, disease, and orphans', and 'Victory of the Korean navy at sea and turtle ships' As it was recorded from the perspective of a foreigner who experienced it firsthand, it deserves to be evaluated as an excellent resource for research on the history of the Imjin War.

 

It is remarkable that the three priests informed the parish office in the form of letters about what happened in Joseon. At that time, the Catholic Church was forming a global network and exerting great political influence, so the three priests wanted to arouse public opinion by informing them of the horrors of the Imjin War. In this way, it can be said that the 'role of a priest in the Japanese military' as claimed by some today is an extremely distorted view.

 

According to the history of the introduction of Catholicism to the Joseon Dynasty, it is known that Western culture was introduced by envoys traveling to and from the Qing Dynasty in the mid-16th century.

 

Crown Prince Sohyeon, who had been taken hostage by the Qing Dynasty after the Byeongja Horan, brought Catholic books to the public when he returned home. In the 18th century, Lee Seung-hoon, who was the first Korean to be baptized and returned home from the Qing Dynasty, was the first to propagate to the noble class and middle class. is said to have been made This is the claim that Catholicism was transmitted from the north, that is, from the Qing Dynasty, and spread from the leadership.

 

In contrast, the missionary activities of the three priests began when they entered Joseon in 1593, a century earlier. This fact is different from the claim that Catholicism was introduced from the north in the mid-16th century. Although the event was made by the invitation of the Japanese army and the scope of their activities was limited against the Japanese military, it is believed that various religious considerations were also taken into account while contacting them, considering that the record of the horrors of the Koreans held captive in the barracks was recorded in Seogin. It is also possible to speculate.

 

What can be seen as evidence to support this conjecture is that when many Koreans captured by Japan were doomed to be sold into slavery, there is a record that the three priests turned many of them back to Catholicism and freed them from slavery. With the efforts of the three priests, it is said that hundreds of people were released from their captivity at this time.

 

Then, what happened to the Koreans who were freed from their prisoner status after that?

 

From Daemado, you can clearly see Busanpo and Geoje Island. It was recorded that the Japanese went to and from Jepo (Ungcheon, Jinhae) overnight. Some of them may have escaped and returned home after the Japanese Insurgency was settled. At this time, some of the Catholics who returned to Korea did their own religious activities even after returning to their homeland. can be guessed.

 

In fact, the fact that Catholicism was strong in the southern coastal areas such as Jinhae and Geoje from an early age, and that many people were persecuted during the Catholic sufferings such as Gihae and Persecution, can be seen as evidence to support this.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the origin of Catholicism in this land was not transmitted from the north, but from the south in conjunction with the Imjin War.

 

The Three Fathers Memorial Park was created by the Spanish government in 1993 to commemorate the 400th anniversary of the first visit of a native (Spanish) priest to Chosun, by producing a commemorative plaque and delivering it to Jinhae City (before it was incorporated into Changwon City).

 

Originally, the monument was installed in Pungho Park behind the new building in Jinhae, but an apartment complex was built in the Nammun district of Ungcheon-dong in 2016, and it was moved to the present location in the park considering that this was the place where the three priests first landed and is nearby. The surrounding sculptures were also erected.

 

When the monument of the three priests was erected in the park, there was an attempt to deny him by labeling him as a ‘war priest’ for preaching the gospel and holding a mass for the Japanese soldiers who were fighting against Joseon. Such attempts have been made before the construction of the monument, and for the same reason, even the Catholic community refuses to publicly promote his activities, which has not been corrected even today.

 

However, as mentioned above, it is not right to deny the three priests' activities even though there are many things worth commemorating and it is a historical fact that is passed down through records.

 

Professor Park Cheol, a former dean of the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who received a doctorate degree from the University of Madrid and studied Father Cespedes, said in his books and lectures that he made the mistake of criticizing only one aspect of history. I'm sorry I'm doing this,' he said.

 

Lastly, I would like to add that Changwon City should take an active role in securing tourism resources. There are various forms of development of tourism resources, such as blessed nature, historical sites, relics, and food.

 

However, it is really sad to have to build a monument and remember the past history. On the other hand, in Gangjin, Jeollanam-do, where Hamel lived for 7 years, he made a ‘Hamel Memorial Hall’ by collecting the traces he left, and in Danyang, North Chungcheong Province, a tourist complex was created based on the story of General Ondal and Princess Pyeonggang. Even compared to these, the activities and stories of the three priests do not seem light at all, but it is not desirable to neglect them.

 

If the city of Changwon follows their footsteps and carefully records the records to create a story, it will discover a new aspect of the history of Catholicism in Korea, and I think it may become a new holy place for Cathol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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